Note/뮤즈

김윤아의 키르케

창작공방 2024. 9. 1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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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아주 오랜 옛날, 또는 아주 먼 미래에 어떤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치치라고 하는 정열적인 여성 지배자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그녀는 백년도 넘게 계속된 영토전쟁으로 전 세계 대륙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황제의 땅을 넓혀 준 1등 공신은 사헬이라고 하는 기사였는데요,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냉정하고 긴 눈매, 믿기지 않을만큼 하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살육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진, 전쟁 마니아였죠.
7년 전의 영토 전쟁에서는 검 한 자루만을 가진 단신으로 3백 명의 적을 죽였다는 얘기가 아직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답니다.

보석을 배설한다는 거짓말 같은 소문의 황제 치치는 신들과의 모종의 거래로 노년의 연령에도 불구하고 처녀 같은 모습이었고, 각각 다른 남편에게서 얻은 두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첫째아들 사딘은 황제의 아버지뻘로 보이는 용모의 학자였고, 둘째 아들 카지마는 황제가 바람의 신과의 사이에서 얻었다는 뒷이야기의 슬퍼보이는 ! 바람둥이였죠.

그리고 막내딸, 우리의 주인공인 황녀님은 황제의 단성 생식으로, 어느 눈 오던날 태어났습니다.

온전한 자신만의 자손을 얻고 몹시 기뻐하고 있는 황제에게, 오랜 친구인 대마법사 키르케가 찾아왔습니다.

"아름다운 자손을 얻으셨군요. 특별한 축복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황녀님을 위해 제가 준비한 두 가지 축복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번째 축복은,
황녀님이 원하시는 단 한 분에게서
평생동안, 그리고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도록 해드릴 겁니다.

 번째 축복은,
황녀님이 원하시는 단 한분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그리고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도록 해드릴 겁니다.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황제?"

허영심 많은 황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두 번째 축복을 선택했습니다.
어느덧 긴 시간이 흐르고 황녀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습니다.
목소리는 꿀과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녹였고, 눈동자는 깊고 맑은 호수와 같아서 누구나 그 눈을 바라보면 거짓말할 ! 수 없었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이슬 맺힌 거미줄처럼 가늘고 빛났으며, 뺨은 복숭아같이 향긋하고 보드라웠습니다.

키르케가 약속한 축복이 아니었어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황녀를 사랑했을 것만 같습니다. 모든 사랑스러운 단어들은 그녀를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었으며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구혼자들이 그녀에게 구혼했습니다.

그렇지만 키르케가 가지고 온 것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습니다.
키르케에게는 용납할 수 있는 인간과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 있었습니다.

황제와 대마법사 키르케는 친구였지만, 키르케에게 황제는 용납할 수 없는 인간으로, 그녀는 황제를 마음속 깊이 미워하고 있었거든요.
키르케의 약속대로 황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얻었습니다.
단 한 사람, 기사 사헬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었죠.

황녀는 우리로 치면 열다섯 정도 되던 생일 연회에서 잠시 황궁의 정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습니다.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애정을 끊임없이 표현하는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있는 것도 참으로 지치는 일이어서 말이죠. 우리의 황녀는 가엾게도 하루 종! 일 사람 손에 안겨 있던 작은 새처럼 피곤했습니다.

정원의 그네에 앉아서 눈 속에서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붉은 꽃들의 농염한 향기에 취해 있을 때, 그녀는 불행히도, 그러나 운명적으로 연회장을 향해 정원을 가로질러 오고 있는 사헬을 보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사헬을 만나고 얘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어떤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하게 반응하는 능력이 있지 않은가요?
그 날 밤, 차가운 전쟁 마니아, 황제의 수석 기사 사헬을 향해 황녀는 결코 보답받을 수 없을 깊고 깊은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냉정함도, 그녀의 차갑고 흰 피부도, 그녀에게서 풍기는 독특한 금속의 냄새도 모두 다 마음이 저릴 정도로 그리웠습니다. 황녀는 1초도 쉬지 않고 사헬을 생각했고 그녀와 만나게 될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지루한 업무 보고도,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던 국사 회의실도, 몇 시간이나 걸리는 고위 관직자 회의도 모두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 설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회의, 어떤 업무 보고에서도 사헬은 황녀에게 !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애정을 그저 받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구하려는 노력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황녀로서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녀를 어떤 식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황녀는 사헬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몇번씩 천국의 환희와 지옥의 절망 사이를 방황해야만 했습니다.당신도 누군가에게 강하게 매료되어 사랑을 느낀 적이 있다면 알고 있겠지만, 이런 경우 사람은 하루 종일 가벼운 흥분 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으며, 별것 아닌 자극에도 괜히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견딜 수 없이 달콤한 나른함에 완전히 취해 구름 위를 걷다가도 순간순간 엄습해 오는 강한 불안과 혹독한 수치심에 고개를 젓기도 하는 법이지요. 보통은 그저 한두 달 정도 지속되는 이 사랑의 흥분 상태가, 우리의 주인공, 허영심 많은 모황과 차갑기만 한 연인을 가진 가여운 황녀에게는 무려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마냥 사랑스러웠던 황녀는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고통에 깊이 잠겨 있는 동안 슬픔을 품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의 소유자로! 빠르게 성숙했습니다.

당연히 황녀의 숭배자들은 더 많아져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더 먼 곳으로부터 출발해 왔고, 황녀가 연회에서 한숨지으면 다음날 황궁을 모두 뒤덮고도 남을 꽃과 선물들이 배달되어 그녀를 위로했고, 황제는 딸을 위해 전 세계에서 고른 3천 명의 미동들로 채워진 궁전을
선물했습니다. 황녀의 두 형제 중 사딘은 원래 고명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었습니다만 여동생을 향한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황족의 신분을 버리고 도망쳐 어떤 신전의 구도자가 되어 버렸습니다.그러나 황녀는 여전히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헬 때문에 이 모든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외로웠습니다. 황제의 만류에도 사헬을 따라 전장으로 나간 일도 있었고, 불쑥 사헬의 저택에 찾아가 곁에서 잠들었던 밤도 적지 않습니다.

값진 보석과 귀한 갑옷, 심지어 신들의 음식이나 무기를 선물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황녀가 사랑하는 사헬의 냉정한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황녀도, 보석도, 신들의 음식도, 어떤 인간이나 어떤 물건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어떤 것이었습니다.

사헬은 물론 황녀에게 충성을 바치? ?어떤 요구에도 복종해 왔지만, 황녀도 사헬에게 "나를 사랑해라"라고 명령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헬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황녀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사헬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2 황자 카지마의 친구이자 배다른 형제인 꿈의 신의 청혼을 받아들여 신들의 나라로 가 버리기로 한 것입니다.

황제는 황녀가 자신의 나라에서 한 달, 신들의 나라에서 한 달씩 사는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꿈의 신은 뛸 듯이 기뻐하며 황녀에게 신의 수명과 신의 능력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하고 황제가 통치하는 모든 영토에서 악몽을 몰아내 주었습니다. 열흘 동안이나 결혼 전의 축제가 계속되고 모든 사람들이 마시고 춤추고 노래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눈처럼 꽃잎이 내렸고 신들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천상의 음표가 기쁨이 되어 거리를 떠다녔습니다.

그리고 황녀는 보석으로 만든 실로 짠 결혼 드레스가 걸려 있는 자신의 침소에서, 비오는 추운 땅의 전장에서 싸우고 있을 ! 사헬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결혼식이 치러지고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신들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황제에게 그 곳이 얼마나 아름답고 환상적인지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황제조차 신들의 땅에 처음 갔을 때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하루 종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신이 되어 신들의 나라에 간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진심을 말해볼까요?
황녀는 마왕이 사는 지옥 가장 깊은 곳에 떨어져 영원히 불탄다고 해도 사헬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만일 마왕이 "사헬을 줄 테니 너의 모황, 너의 형제, 너의 백성을 나에게 팔아라" 라고 요구했더라면 주저하지 않고 팔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황녀는 언젠가 사헬에게 처음 사랑을 느꼇던, 지지 않는 붉은 꽃 정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믐달이 푸르게 빛나고, 바람은 꽃 내음을 안고 불어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흰 꽃잎 속에, 1년사이에 아이에서 성인으로 훌쩍 자라 버린 자신의 모습이 더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황녀는 들고 있던 단도를 심장으로 향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습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두 뺨에 눈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이내 황녀는 단도를 심장에 꽂은 채, 눈처럼 하얀 꽃잎이 쌓인 붉은 꽃 정원 위에 붉은 피를 뿌리며 영원히 잠들어 버렸습니다.

황녀의 서거로 온 세상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수많은 숭배자들이 그녀를 따라 죽음을 택했으며, 그녀의 약혼자 꿈의 신이 충격으로 쓰러져 자리에 눕는 바람에 사람들은 잠들어도 꿈을 꿀 수 없었습니다.

구도하고 있던 제1황자 사딘은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으로 장례에 참석했고, 황녀와 각별히 사이가 좋았던 제2황자 카지마는 슬픔을 가누지 못해 장례에 참석 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장례식에 자리한 모든 사람들이 복받쳐 오르는 깊은 슬픔에 오열했고, 수의로 바뀐 웨딩드레스에 싸여 창백하게 눈을 감고 있는 황녀의 시신을 황제는 몇 시간이고 망연히 안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전 세계의 고명한 조각가들을 모두 소집해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황녀의 동상을 만들어 황궁 안에 세웠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거대한 상아로 만들어져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황녀의 등신상! 이 황궁에서도 전망이 가장 아름다운 남쪽 회랑 앞 복도에만 아흔아홉개, 나머지 황궁 구석구석에 수백 개나 세워졌습니다.

황제의 마지막 영토 전쟁으로 기록될 북쪽의 비오는 추운 나라에서의 전쟁을 역시 승리로 이끌어 세계 정복의 과업을 완수하고 돌아온 수석 기사 사헬은 슬픔에 잠긴 황제를 남쪽 회랑에서 알현하고 복도를 지나며 그제야 황녀의 모습을 바라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에게 말을 걸어 주었습니다.

"평안하십니까?"

사헬이 몸을 돌려 평소의 냉정한 걸음걸이로 회랑의 복도를 지나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살아 있을 때처럼 아름다운 황녀의 동상이 조용히 눈물지었습니다.

- 김윤아 <shadow of your smile> 中 - 

  https://youtu.be/jZLwjwjgq1I?si=bhzCyo2tE4G29mDA

김윤아의 파애

워터하우스  <질투하는 키르케>  1892  (캔버스유채 180.7*87.4)


마녀 키르케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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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 일행은 항해를 계속하여 또 한 섬에 이르렀다. 오디세우스는 여기에서도, 파도가 덜 밀려드는 조용한 해변에다 배를 대게 했다. 이틀 밤낮 동안 오디세우스와 뱃사람들은 하는 일없이 가까운 해변에서 쉬었다. 무서운 모험과 험한 뱃길에 지친 나머지 도무지 다른 일을 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오디세우스는 칼과 창을 챙겨들고 혼자 산을 올랐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섬 전체는 숲으로 덮여 있었다. 섬을 덮고 있는 무수한 나무가 흡사 검은 양털 같았다. 바다는 사방에서, 섬을 둘러싸고 있는 해변을 핥고 있었다. 논밭이나 사람이 살 만한 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섬의 한가운데, 숲이 가장 짙은 곳에서 실오라기 같은 붉은 연기 한 자락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그 연기의 정체를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섬에서 겪어온 무서운 일들이 생각나서 선뜻 그렇게 하기가 망설여졌다. 아무래도 배로 돌아가 뱃사람들을 잘 먹인 뒤에 정찰대를 뽑아 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오디세우스는 온 길을 되짚어 갔다. 해변에 이르렀을 때였다. 붉은 사슴 한 마리가 덩굴 밑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사슴 한 마리면, 오랫동안 고생을 참아온 뱃사람들을 잘 먹일 수 있을 터였다. 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는 사슴을 향해 창을 던졌다. 명중이었다. 그는 사슴의 네 다리를 덩굴로 묶어 어깨 위에 둘러메고는 창을 지팡이 삼아 짚으면서 배로 돌아왔다. 오디세우스가 돌아왔을 때까지도 뱃사람들은 배 주위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다. 여전히 피로가 풀리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는 사슴을 부하들 있는 쪽으로 던지면서 외쳤다.

 

"힘을 내자.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 우리 옆에 먹을 것 마실 것이 있는데 굶어 죽는다 는게 말이나 되느냐?"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불을 피웠다. 그 날 저녁 그들은 사슴 고기로 배를 채우고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오디세우스는 일행을 두 편으로 갈라 한 편은 자신이 지휘하고 다른 한 편의 지휘권은 먼 친척인 에우륄로코스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나무 조각 두 개 중 하나에다 표를 한 다음 투구 속에 넣고 흔들었다가 제비를 뽑았다. 연기의 정체를 밝히러 나갈 정찰대를 뽑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에우륄로코스 편이 정찰대로 뽑혔다. 에우륄로코스는 스물 두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배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에우륄로코스는 저물녘에야 돌아왔다. 뜻밖에도 혼자 돌아온 것이었다. 혼자 돌아온 에우륄로코스는 부들부들 떨면서 훌쩍훌쩍 울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자기가 당한 무서운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그랬던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그는 마음의 고요를 되찾고 그 동안 정찰대가 당한 일을 얘기했다.

 

"숲 한가운데에는 아름다운 돌집이 있었습니다. 길이 잘 든 이리와 사자가 고삐 풀린 채 집 주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이리와 사자 무리는 사냥개처럼 재롱을 피 우는가 하면 우리 어깨 위로 오르면서 얼굴을 핥기도 했습니다. 한 여자가 집 앞 베란다에 놓인 베틀 앞에 앉아 있더군요. 여자는 아주 가는 실로 베를 짜면서 부드럽고 달콤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 중 하나가 그 여자를 불렀습니다. 여자는 베틀에서 일 어 났습니다. 짙은 색깔 옷을 입은,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머리와 팔뚝에는 금 으로 만든 장식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여자는 대문을 열고 우리에게 들어오라 고 하더군요. 모두 들어갔습니다. 저는 혹시 함정이 아닐까 해서 바깥에 숨은 채로 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고 있으려니까, 여자와 하녀들이 우리 뱃사람들을 긴 걸상에 나란히 앉히고는 포도 주를 꺼내어 아주 친절하게 따라 주더군요. 그런데 우리 뱃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시자, 여자 는 구부정한 나무 막대기를 하나 꺼내더니 우리 뱃사람들 머리에다 차례로 대는 것입니다. 여자가 막대기를 머리에다 대는 순간, 뱃사람들 몸에서 뻣뻣한 털이 돋고 주둥이가 툭 튀어 나오지 뭡니까. 그뿐인 줄 아십니까? 앉아 있던 뱃사람들이 두 팔과 두 발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리더군요. 더 이상은 사람이 아니었지요. 돼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돼지가 되어 버 린 뱃사람들은 여자를 둘러싸고 꿀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웃으면서 돼지들을 바깥으로 몰아냅디다. 돼지들은 숨어 있는 제 옆을 지나 돼지우 리로 들어갔고요. 여자는, '너희들이 있어야 할 곳은 돼지 우리다.'하더군요. 더러운 돼지 우리에서 저의 동료 뱃사람들은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울고요."

 

이야기를 다 들은 오디세우스는 칼이 매달린 가죽 허리띠를 차고 활을 들고는 에우륄로코스에게 마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그러나 에우륄로코스는 무릎을 꿇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면서 애원했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장군. 저는 그 곳으로 다시 갈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도 가지 마십시오. 이제 그들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에우륄로코스를 다른 부하들 있는 곳에 남겨 두고 혼자 숲을 찾아 들어갔다.

 

숲 속에서 그는 신들의 심부름꾼인 헤르메스 신을 만났다. 잘생긴 청년 모습을 한, 신들의 심부름꾼인 헤르메스 신은 오디세우스의 팔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마녀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둔갑한 부하들을 구하러 혼자 숲으로 들어온 모양이군.

 

하지만 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대 역시 돼지가 되고 말아.” 그는 발치에 있던 풀 한 포기를 뽑아 오디세우스에게 건네 주었다. 꽃은 우유처럼 희고 뿌리는 밤의 어둠처럼 새까만 풀이었다. 인간의 눈에는 띄지도 않고, 따라서 인간은 도저희 뽑을수 없는 풀이었다. 헤르메스 신은 그 풀을 오디세우스에게 주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이 약초를 받아 가지고 가거라. 그러면 마녀 키르케가 만들어 주는 마법의 포도주도 그대의 모습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키르케가 가지고 있는 마법의 막대기도 그대를 해코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에 키르케가 마법의 막대기로 그대를 건드리거든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어 금방이라도 찌를 듯이 위협하라. 그러면 키르케는 겁을 먹고 그대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키르케가 겁을 먹고 그대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 마법에 걸리지 않은 인간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키르케는 그대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빌 것이다. 그대는 키르케가 원하는 것을 베풀어 주라. 하지만 그 전에 다짐을 받아야 한다. 먼저 돼지가 되어버린 부하들의 모습을 사람으로 되돌리고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에게 다시는 그같이 못된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헤르메스 신은 이 말을 남기고는 환하게 빛나는 길을 따라 신들의 궁전이 있는 올림포스로 날아가 버렸다. 오디세우스는 옷의 앞섶을 열어 그 안에 풀을 넣고는 옷깃을 여몄다. 풀의 싸늘한 감촉이 살갗에 느껴졌다.

 

이윽고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집 앞에 이르러, 베틀 앞에 앉아 부르는 키르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가 현관 앞으로 접근하면서 키르케를 불렀다. 길이 잘 든 이리와 사자 무리가 다가와 그의 뺨을 핥기 시작했다. 키르케가 나오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가 들어가자 키르케는 은으로 장식된, 발 받침대가 있는 의자를 권하고는 포도주에다 치즈와 보릿가루와 꿀을 타고는, 손바닥으로 감추고 있던 유리병에서 뭔가를 꺼내 포도주에다 떨어뜨렸다.

 

"드세요.제 집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옷섶에 감춘, 꽃이 하얀 풀을 믿고는 그 마실 거리를 단숨에 마시고 잔을 내려 놓았다. 그러자 키르케는 예의 그 가느다란 막대기를 꺼내어 오디세우스의 머리를 건드리고 나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도 어서, 바깥에 있는 돼지 우리로 가거라."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돼지가 되어 돼지 우리로 가기는커녕 칼을 빼들고 키르케에게 달려들었다. 키르케는 비명을 지르면서 칼날을 피해 오디세우스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는 소리쳤다.

 

"내 마법이 듣지 않다니, 당신은 누구신가요? 오디세우스가 분명하지요. 언젠가 헤르메스신께서는 오디세우스라는 사람이 트로이아에서 뱃길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섬에 들를 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빕니다. 서로 마음을 열어, 서로 믿고 친구가 될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오디세우스는 여전히 칼을 움켜진 채로 키르케를 내려다보면서 명령했다.

 

"먼저 나와 내 부하들에게 해코지하는 않겠다고 신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오디세우스는 그제서야 칼을 칼집에 꽃아 넣었다.

 

키르케의 네 하녀가 나왔다. 봄과 나무의 여신의 딸인 네 하녀는 은식탁 앞 의자에다 보라색깔개를 깔고 은식탁 위에 음식을 차린 다음 은술잔에 포도주를 가득가득 따랐다. 그런 다음에는 물을 데워 오디세우스 몸을 씻겼다. 오뒤세우는 따뜻한 물에 머리와 어깨를 담근 채 쌓이고 쌓인 피로를 풀었다. 목욕이 끝나자 하녀들은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는 식탁 앞으로 안내하여 우선 먹고 마실 것을 권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이제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대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요."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의 말을 받았다.

 

"내 부하들은 어쩌고요? 그개 때문에 내 부하들은 돼지가 되어 돼지 우리에 잡혀 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서 먹고 마실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키르케가 바깥의 돼지 우리로 나갔다. 키르케는 돼지 우리 문을 열고 들어가 돼지들을 앞으로 불러모으고는 그 가느다란 막대기로 돼지의 머리를 하나씩 차례로 건드렸다. 그러자 돼지는, 돼지로 변하기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으로 되돌아왔다. 사람의 모습을 되찾은 뱃사람들은 선장인 오디세우스 장군에게 몰려와 어깨동무를 한 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양해를 얻어 배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안전한 해변가에 배를 끌어다 붙이고 무기는 모두 모아 가까운 동굴에 숨기기로 했다. 그의 부하들에게는 얼마간의 휴식이 필요했다. 다시 뱃길로 나서자면 보급품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당분간 키르케의 섬에 머물기로 하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배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 남아 있는 나머지 부하들에게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한동안 잘 먹고 잘 자면서 휴식을 취하라고 하더라는 키르케의 말을 전했다.

 

에우륄코스를 제외한 다른 부하들은 모두 키르케의 제안을 반가워하면서 금방이라도 배를 해변으로 끌어다 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에우륄로코스는 여전히 악몽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키르케의 집으로 되돌아갈 것이 아니라 한시바삐 난바다로 배를 내몰아 마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자고 애원했다.

 

오디세우스는 금방이라도 에우륄로코스를 베어 버릴 듯이 칼을 뽑아들었다. 비록 가까운 친구, 먼 친척이라고는 하나 그대로 두면 에우뤼로코스의 공포가 다른 뱃사람들에게까지 퍼져 나갈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뱃사람들은 에우뤼로코스만 남겨 두어,자기네들이 키르케의 집에서 배불리 먹을 동안 배를 지키게 하자고 졸랐다. 오디세우스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일행이 에우륄로코스를 남겨 두고 키르케의 집을 향해 한참 걸었을 때 뜻밖에도 에우륄로코스가 따라왔다. 동료들과 함께 마녀의 집으로 가는 것보다는 혼자 남아 배를 지키는 것이 훨씬 무섭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행이 모두 함께 키르케의 집으로 갔다. 잔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